클리프의 인생과 캐리어에 관련하여 일어난 일들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1. 로저 웹과 도로시 데이즐리의 결혼 - 1939년 4월 26일
 
로저의 친척들은 철도시설을 건축하려는 임무를 띠고 인도로 건너 온 반면, 도로시의 친척들은 군인으로 모국을 떠났다. 1936년 도로시는 장래 남편감인 로저 웹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로저는 도로시의 가족들이 아산솔에서 살고있을 때 같은 아파트에 살고있는 자신의 누이동생을 방문하러 왔었다. 로저는 서른 한 살, 도로시는 열 여섯 살이라는 현저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그가 하우라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곳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에 빠졌으며, 거의 3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후 1939년 4월 26일 아산솔에 있는 세인트 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결혼과 동시에 새 가정을 꾸밀 예정인 북서쪽에 있는 데흐라 던으로 이사했다
  2. 해리 로저 웹, 태어나다 - 1940년 10월 14일
 
1940년 10월 14일 월요일, 도로시 웹은 세계를 뒤흔들어 놓을 인물이 될, 체중이 9파운드인 남자아이를 낳았다. 해리 로저 웹은 데흐라 던에 큰 병원이 모자랐기 때문에 럭크나우에 있는 킹즈 잉글리쉬 병원에서 태어났으며, 마을로 돌아오면 '로저 해리로 세례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클리프의 대모가 세인트 토마스 교회에서 있은 실제 세례식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해리 로저'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대로 세례를 받게되었다.
  3. 해리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다 - 1946년 9월
 
커서 클리프 리처드가 되는 소년은 하우라의 처치로드에 있는 세인트 토마스 교회에 딸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식구들의 하인인 하비브는 그의 점심을 매일 학교로 날라 와서는 바나나 나무의 스탠드에 놓아두곤 했다. 해리의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은 랄이었는데, 그는 영어를 전혀 못 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힌두어로 이루어졌으며, 해리는 아버지로부터 약간의 사전공부를 한 후 학교에서 힌두어를 배웠다
  4. 웹 가족 영국으로 떠나다 - 1948년 8월 24일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인도에서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났다. 독립이 확실한 명제로 다가오자, 힌두교도와 모슬렘교도간의 오래된 종교분쟁이 표면화되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폭도들이 거리에 난무하게 되었다. 인도에 살고있는 영국사람들은 폭동자들의 목표가 되었으며, 해리의 어머니는 인도인들과 물건을 사러 갔을 때 "백인 여자는 영국으로 돌아가라"는 야유를 받았다. 격렬한 폭동기간 중 이웃에 있는 모슬렘 가족은 정원에 숨어있던 어린 소년을 빼고는 온 가족이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캘커타 경찰관인 도로시의 삼촌이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그 소년에게 음식을 주어서 살아있게 도와주었다. 이 경험은 해리 가족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으며, 그녀의 삼촌이 폭동으로 인해 피와 살 조각이 묻어있는 차를 몰고 도착했을 때 이제는 인도에서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로저는 가족을 호주로 데려가고자 했으나, 도로시는 자신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살고있는 영국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8월21일 토요일 그들은 기차를 타고 봄베이로 떠났으며, 그로부터 3일 후 렌치라고 불리 우는 귀국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9월 13일 오후 6시 렌치는 영국의 틸비독스에 도착했다. 인도에서의 호화생활 후에, 웹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분투해야 했고,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공동 메트리스에서 잠을 자야했다. 그들은 시가 임대하는 채쉬헌트에 있는 노동자계급이 사는 집을 1951년 4월에야 배당 받았다.
  5. 해리 웹,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 1952년 9월
 
해리는 800명을 수용하는 새로 지은 채쉬헌트 카운티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클리프는 곧 사커, 럭비, 스프린팅, 심지어는 창던지기에서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는 등, 운동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일생에 절친한 친구로 남아있는 제이 노리스 교사를 통해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6. 연극데뷔 - 1954년 2월
 
클리프는 연극데뷔를 쉴라 버클리의 'The Price of Perfection'으로 했는데, 이는 훗날 예매 기록을 갱신하게되는 그로서의 소박한 시작이었다. 제이 노리스가 클리프에게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은 1955년 학교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연극에서였다. 제이에 따르면 그는 그녀에게 래티의 역할을 하고싶으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이건 대단히 간단한 거야 네가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면 래티역도 할 수 없어"라고 응수했다. 해리는 래티역을 맡았고, "아주 아름답게 노래를 불렀다"고 그녀는 말했다.
  7. 해리, 엘비스의 노래를 듣다 - 1956년 5월
 
1956년 5월 어느 토요일 해리는 친구 몇 명과 월탬크로스 거리를 걷고있었는데, 이 때 그의 인생을 전적으로 바꾸어놓을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정차해있던 시트로엔의 라디오에서 나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이었는데, 소년들은 그들이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듯한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클리프는 "내가 처음으로 엘비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악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전에 누구도 그렇게 노래부르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엘비스의 노래를 들었을 때, 내가 시도한 다음단계는 그걸 따라해 보는 것이었다." 고 말했다. 해리와 그의 친구들은 집에 돌아가서 라디오를 룩셈부르그 라디오 방송과 미 공군 네트워크에 맞추어 놓았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해리 웹을 클리프 리처드로 바꾸어 놓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듣기 위함이었다.
  8. 퀸토운즈 일원으로 한 첫 로큰롤공연 - 1956년 7월 14일
 
엘비스 노래에 고무된 해리와 그의 친구들인 베티 클락, 프레다 존슨, 존 빈스, 베릴 몰리네는 홀리트리니티 학교의 모금조성을 위한 프랑스계 영국인들의 댄스장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퀸토운즈'라고 짓고는 친구의 집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그날 밤 250명의 사람들은 그 이후 역사상 다른 어떤 가수보다도 많은 히트싱글을 가지게 될 사람의 데뷔장면을 본 것이었다. 짧은 공연이었지만 그는 몇 달 전에 자신에게 로큰롤에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준 Heartbreak Hotel을 포함해서 불렀으며, 이는 그의 미디아로의 첫 번째 등장이 되었다.
  9. 첫 여자친구 - 1956년
 
퀸토운즈는 어린 해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여자아이인 베티 클라크와 가깝게 해 주었다. 15세 때 그녀는 해리의 첫 번째 여자친구가 될 뻔했다. 해리가 그의 첫 번째 여자 친구를 찾아 낸 것은 1958년이었는데, 그녀는 그가 채쉬헌트 지역의 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 온 제니스 베리였다.
  10. 해리 웹에 대한 첫 번째 비평 - 1956년 12월
 
체쉬헌트 고등학교 연극에서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해리는 체쉬헌트 주간 텔레그라프지에서 그의 첫 번째 비평을 받았다. 그 기고는 "해리 웹은 밥 크래쳇으로 분장하고 연기를 잘 했으나, 분장 팀의 실력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그 자신이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걱정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10대라는 인상을 떨구어 버릴 수가 없었다."는 평을 받았다.